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힘러 (문단 편집) === 최후 === || [[파일:himmler_suicide.jpg|width=400]] || || 하인리히 힘러의 시체[br] || 1945년에 하인리히가 소유한 나치의 무장친위대의 전력은 80만 명 혹은 91만 명에 이르는 수준의 규모로 성장했고 여기에다 일반친위대(Allgemeine-SS)를 합하면 그 숫자는 거의 200만 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45년 봄부터 하인리히는 이런 거대한 수준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는 나치 체제가 살아남으려면 [[영국]] 및 [[미국]]과 평화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힘러는 [[덴마크]] 국경지대 뤼벡(Lubeck)에서 항복하거나 또는 자신이 지배하는 나치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힘러는 미군과 [[윈스턴 처칠|영국군이]] [[언싱커블 작전|독일군과 힘을 합쳐서 같이 소련군을 격퇴시킬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힘러가 담당하고 있던 직위는 친위대 원수, 경찰총감, 독일 국민회(German Nationhood) 의장, 내무장관, 국민돌격대(Volkssturm) 총사령관, 그리고 독일 내 예비군 총사령관일 정도로 그는 거대한 권력의 소유자였고, 그 권력으로 자기가 살 궁리를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무장친위대를 창설해 전쟁터에서의 전공에도 욕심을 내게 되었으며, 괴링이 스스로의 실책으로 점차 실각하자[* 전황이 나치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고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포위되자, 히틀러에게 퓌러가 싸우다 죽으면 원래 약속대로 다음 퓌러 자리는 자신에게 줄 것을 요구했다가 이미 될 대로 되라 상태이던 히틀러가 격분해서 괴링을 배신자로 선포해 버렸다.] 힘러도 본격적으로 자기 살 길을 찾기 시작한다. 이미 1944년 여름 힘러의 수하였던 셸렌베르크는 스톡홀름에서 미국 외교관과 접촉하기도 했으며, 셸렌베르크는 이 접촉을 힘러에게 보고했다. 처음에 힘러는 셸렌베르크에게 화를 냈으나, 셸렌베르크가 힘러에게 독일의 패전 속에서 당신의 목숨은 구해야 한다면서 끈질기게 설득하자 힘러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셸렌베르크는 1945년 초에 [[스위스]]에 있는 심복에게 지시하여 미국과 접촉하기도 했으며, 미국과 독일이 동맹을 맺어서 소련과 함께 대항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폴케 베르나도테|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셸렌베르크가 협상을 위해서 접촉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1945년 2월에서 4월 정도였다. 베르나도테 백작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억류자들의 안전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였고, 그러자 힘러의 지시를 받은 셸렌베르크는 베르나도테에게 수용소 안전을 확인시켜 주면서 자신과 연합국 측의 협상을 중간에서 도와줄 것을 제안했다. 1945년 4월부터는 힘러가 히틀러의 신임을 잃은 상황이였기 때문에 힘러도 덴마크 국경 근처 뤼베크에서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두 번 접촉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다, 1945년 4월 23일 힘러는 베르나도테를 통해 스웨덴 정부에 미국과 평화 협상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스웨덴은 힘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힘러는 미국에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고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령부와 접촉하면서 자신을 나치의 고위 간부로 고발하는 대상에서 제외시켜 준다면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만들겠다고 말하며, 아이젠하워에게 개인적으로 전후에 새로 구성되는 독일 정부에서 경찰장관의 지위를 얻기를 원한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영화 '몰락'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힘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와 '''[[김칫국#s-2|첫 회합에서 어떤 식으로 악수할 것인지를 고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영화 몰락에서도 재현되며, 그의 부관 [[헤르만 페겔라인]]조차 이 말을 들은 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하인리히 힘러와의 어떠한 제안이나 거래도 거부했고, 1945년 4월 24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독일이 항복한다는 생각은 모두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결국 힘러는 이러한 협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힘러가 제시한 협상 조건을 요약하자면, 영화 [[다운폴|몰락]]의 그 유명한 지도 장면에서도 나온 히틀러의 뚜껑을 열리게 만든 펠릭스 슈타이너의 공세 차단의 장본인이 바로 그로, 슈타이너의 부대를 근처 친위대 병력과 합친 3만 병력을 보존 항복 협상용으로 써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연합국과 협상하여 연합국에게 나치 정권의 정보를 제공하고, 유대인 처형을 중지하고 여러 수용소를 개방하여 그 대가로 다시 새롭게 세워질 독일 정부의 관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미 이런 자에게는 관심이 없어진 뒤였다. 힘러는 전후 정세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나마 폴케 베르나도테는 그런 환상에서 깨고서 정신을 차렸지만 힘러는 끝까지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베르나도테 백작을 통한 협상과 미국에 망명하려는 협상은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연합국은 이미 그를 주요 전범이며 최우선 체포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힘러의 제안은 아무 통제 없이 영국 언론에서 방송되었으며, 음모를 꾸미는 데 재능이 있었던 보어만은 이를 들은 뒤,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힘러의 배신에 격분한 히틀러는 체포 사살령을 내리지만 이미 힘러는 멀리 도망간 상태.[* 친위대 원수와 독일 경찰청장의 지위로는 히틀러가 [[카를 한케]]를 승격시켰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벙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에 보어만이 보낸 전문을 쥐어주며 가장 오랜 동료인 '충성스러운 하인리히'가 자신을 배반했다면서 계속 분노했다. 그 당시 히틀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히틀러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고 거의 미쳐 날뛰는 수준으로 화를 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서 함락되자 하인리히 힘러는 베를린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플론 근처에 있던 [[카를 되니츠]] 해군원수를 찾아서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하고자 했다. 카를 되니츠가 서부지역의 모든 독일군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었는지 힘러를 체포하고 사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은 되니츠에겐 도달하지 않아서[* 정확히는 되니츠가 히틀러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되니츠는 히틀러의 유언장을 한 자도 빠짐없이 잘 읽었다. 그러나 되니츠는 무력이 없었고 힘러는 자체적인 군사조직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힘러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힘러가 되니츠한테 도착했을 때 되니츠는 힘러와의 대면을 ‘대결’이라고 표현했다. 되니츠는 협상이 잘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책 밑에 권총을 숨겨두고 힘러를 만났으나, 힘러가 의외로 쉽게 되니츠의 부하가 되겠다고 하자 "그러세요."라는 한 마디로 상황이 종결됐다. 그리고 되니츠는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명예적 고문으로 힘러를 위촉하는 대신 내각 업무에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힘러는 되니츠가 무력이 자신보다 강할 거라는 생각에 되니츠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되니츠는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되니츠와 그 주변 인물들은 힘러와 붙어있어 보아야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며, 연합군의 호의를 얻고 싶어했던 되니츠는 결국 힘러를 1945년 5월 6일부로 정부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도 힘러는 살아남으려고 별의별 시도를 했지만, 결국 모든 시도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하인리히 힘러는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혀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때 힘러는 거의 실제 역사에 가까운 예측을 했는데''' [[냉전|'서방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싫어하게 될 것이고]] [[라인 강의 기적| 이때가 될 때 독일은 구사일생할 것이다.]] 이때까지 도망자 인생을 살겠다' '''고 말하고 사라진다. 이는 힘러가 식견이 남달라서가 아니고 전쟁 말기 패전이 불 보듯 뻔해질 시기에 히틀러고 국방군이고 나치고 일반 독일인 국민까지도 '연합국이 우릴 어느 정도 패면 화가 풀리고 영미 자본주의자들의 철천지 원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소련 치는데 독일을 선봉으로 세우면 좋지 아니할까?' 라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영미와 소련은 2번이나 전쟁을 일으켜서 유럽을 박살낸 독일을 어떻게든 두들겨패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고 여겼고 항복 이외의 타협은 불가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연합군에 체포되는 것을 피해서 되니츠 정부의 수도였던 덴마크 국경 근처 플렌스부르크 주변에서 며칠 간 숨어지냈지만 되니츠에게 쫓겨난 후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힘러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핵심 범죄자로 지정되어 다른 나치의 고위 간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라 붙어있어 봐야 영 좋은 꼴이 안 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힘러의 부하들도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다. 힘러가 사라지자 연합군 정보기관들은 A급 [[전범]]이었던 그를 체포하기 위해 플렌스부르크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고 그의 사진도 점령군에 뿌려졌지만 그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이후 힘러는 체포를 피하면서, 바이에른으로 갈 생각을 하며 헌병으로 위장했다. 그는 '하인리히 히칭거(Heinrich Hitzinger)'라는 가명을 쓰며 콧수염을 밀고 안경과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모자를 쓰며 안대까지 한 후 가장 충성스런 SS 대원 두 명[* 참고로 이 두 명 중 한 명은 [[T-4 프로그램]]과 생체실험을 자행한 인간말종 [[카를 게브하르트]]였다.]과 동행해 그냥 일반 장교인 척 한 후 포로 신분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힘러는 일반 장교는 무조건 체포 후 심문대상인 걸 몰랐고 제대로 된 신분증도 없는 대다수의 난민과는 달리 너무 깨끗한 신분증을 준비해 내놨기에 의심받았다. 그가 비밀헌병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도 의심을 받은 이유였는데, 이유인즉 원래 군사정보국 소속이다가 나중에 [[게슈타포]]에 통합된 비밀헌병 대원들은 전부 연합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러는 영국군에게 체포된 후 포로 수용소에 구금된다. 힘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국군에 체포되어 031 민간인 신분으로 수용소에 호송되었다. 그곳의 수용소장이였던 셀베스터 [[영국 육군]] [[대위]]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의 사무실에 처음으로 들어선 사람은 키가 작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바로 뒤에 키가 크고 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체격이 좋았고 다리를 절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부사관에게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독방에 갇힌 힘러는 자신의 신분이 곧 발각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힘러는 수용소장에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 요청하여 수용소장에게 불려갔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온 후 안대를 벗고 예전에 썼던 안경으로 바꿔 낀 후 독일어로 나직한,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Ich bin Heinrich Himmler.''' >'''내가 하인리히 힘러요.''' 수용소는 난리가 났고 그러다가 모두가 진정한 후, 여행으로 지저분해진 낡은 옷 대신에 새 영국 [[육군]] [[전투복]]이 그에게 제공되었지만 힘러는 그것을 거부하고 담요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셀베스터가 직접 몸수색을 했는데 수색 방법은 벗은 옷을 부사관에게 하나씩 건네면 부사관이 그것을 다시 조사하는 방식이였다. 힘러는 하인리히 히칭거(Heinrich Hitzinger)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 신분은 집배원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재킷 안에서 작은 황동 케이스 2개를 발견했는데 타 약통과 비슷하게 생긴 그 케이스에는 유리로 된 작은 약병이 담겨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일단 힘러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묻자 그는 "그것은 내 약입니다. 위경련 치료제이죠."라 대답했다. 하지만 또 다른 케이스에는 약병이 없었고, 그가 몸 어딘가에 약병을 숨기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셀베스터는 힘러의 옷을 전부 벗기고 그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조사했다. 머리도 빗기고, 약병을 숨길 만한 곳을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약병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입은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다. 셀베스터는 약병이 입 안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지만 강제로 제거하려고 했다가는 영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사람들을 보내 두꺼운 [[빵]]과 [[치즈]] [[샌드위치]], 그리고 [[홍차]]를 가져오게 했고, 그것을 힘러에게 주면서 그가 입에서 무엇을 제거하는지 확인하려고 했고, 힘러가 먹는 동안 그를 유심히 관찰했으나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에 대비하여 독극물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셀베스터는 안심하지 못했다. 예전에 주의가 허술한 틈을 타서 친위대 고급 장교 한 명이 치아 사이에 있던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어 죽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잡았던 나치의 [[전범]] 가운데 가장 핵심인물이었던 하인리히 힘러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참모인 마이클 머피에게 인계되었다. 그 또한 힘러가 독약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에드윈 오스틴과 [[군의관]]인 C.J.L 웰스와 함께 힘러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수색을 시작했다. 그 뒤 군의관 웰스가 힘러에게 입을 열라고 말하고, 힘러가 입을 열자마자 그의 오른쪽 아래 턱 치아들 사이 공간에 [[알약|작고 검은 덩어리]]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웰스는 두 손가락을 힘러의 입에 집어넣어 그것을 빼려고 했지만, 갑자기 힘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군의관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자 군의관은 "그가 독약을 삼켰습니다"라고 소리쳤고, 머피와 오스틴 그리고 휘태커 등이 힘러에게 달려들어 그를 엎드리게 해서 독약이 위로 가지 못하도록 한 뒤 토하게 만들려 했고, 혀를 꺼내기 위해 무명실을 꿴 바늘을 혀에 꽂아 넣었고, 그 다음에 독을 씻어내기 위해서 몸을 뒤집어 입에 물을 부었지만 모든 일이 허사였다. 결국 휘태커는 "우리는 지금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비열한 놈은 23시 14분에 숨을 거두었다"라고 말한 뒤 시체를 바로 눕히고 담요를 덮은 뒤에 그 자리를 떠났다. 시신은 영국 정부에 의해 촬영되어 공개되었다. 이로 보건대 힘러는 처음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을 소장에게 밝힌 뒤 정치적 협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거의 전범 대접을 받게 되자 그제서야 연합국 측이 자신을 협상 대상이 아닌 전쟁범죄자로 간주하고 이대로 가면 재판에 넘겨져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싹 까발려진 뒤 사형당할 일만 남았다는 걸 깨닫고 결국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는데, 육군 치의관이 기념으로 힘러의 치아 2개를 뽑겠다고 했다 거절당했다. 그가 죽고 기자와 사진사들 그리고 많은 영국군 장병들이 모여들었고 시체는 다음날 하루 종일 손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었다. 몽고메리 장군의 참모 중 일부 장교들은 죽은 자를 군대식으로 매장할지 기독교식으로 매장해야 할지를 두고 논의했지만, 그가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어떤 매장의례도 필요없다'''는 몽고메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영국 육군 바지와 셔츠를 입고 독일군 양말을 신은 힘러의 주검은 군용모포로 싸서 전화선과 위장망으로 고정되었고, 그 뒤 뤼넨부르크에서 화장되어 강에 뿌려졌고 1947년 뤼넨부르크 법원에 사망신고가 접수되었다. 영국 정부는 그가 사망한 지역 근처에 화장한 뒤 뿌렸다고만 했을 뿐 위치는 아직도 비밀로 남아있다.[* 그런데 타 자료를 인용한 영문위키에서는 위치가 비밀인 것은 맞는데 [[https://en.wikipedia.org/wiki/Heinrich_Himmler#Capture_and_death|힘러의 시체가 '''표지 없이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뤼넨부르크에서 자살한 하인리히 힘러는 본인이 아닌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인 작가 조셉 벨링거의 '하인리히 힘러의 죽음'에선 1945년 5월에 영국군 심문관에 의해 [[SS]]와 [[국방군]]의 다른 고급장교들과 함께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실렸다. 영국 정보부가 하인리히 힘러와 [[윈스턴 처칠|처칠]]이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힘러를 살해하고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힘러의 딸 [[구드룬 부르비츠|구드룬 힘러]]도 주장했는데, 그녀는 하인리히 힘러가 자살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살 직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사열을 받는 자세인데 독약을 삼킨 사람의 시체가 그런 자세로 누워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였다. 벨링거의 책은 독일의 아른트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이와 비슷한 주장을 담은 책으로 마틴 알렌이 쓴 '하인리히 힘러의 비밀전쟁'에서 유사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담은 책과 문서들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로 밀반입되어서 들어온 조작된 문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혀 근거가 없는 문서이다. [[오스트리아]]의 [[유사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은 하인리히 힘러가 영국군 심문관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타로 인해 힘러의 코가 부러졌다지만 여러 사진들에서 그런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이러한 힘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은 역사학자들에게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애초에 법정에 기소해서 홀로코스트의 진상을 밝혔어야 했는데 조사도 없이 구타해 죽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